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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어 표기법 향찰 , 이두 , 구결 .. [吏讀] LINK



위키백과. 참고자료


Old Korean


자료와 표기

고대 한국어 시기는 한글이 없었기 때문에 그 자료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등 역사서에 나타난 지명과 인명, 이두, 향찰, 구결과 같은 한자 표기된 자료에 한정된다. 한국어가 한자에 의하여 암시적으로 표시되기 때문에 그 어형을 정밀하게 복원하기는 쉽지 않다. 아래에 몇 가지 복원 예를 제시한다.

《삼국사기》(권34)의 신라 지명 ‘永同郡本吉同郡(영동군은 원래 길동군이다)’의 기술에서 ‘永’과 ‘吉’이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한자 부분의 원래 한국어는 ‘*길’로 추정되는데, ‘길’과 같은 소리의 한자로 표기한 것이 ‘吉’이며 형용사 ‘길(다)’의 뜻을 나타내는 한자로 표기 한 것이 ‘永’이다. 여기서 신라어에서 ‘길다’의 뜻을 나타내는 단어가 현대어와 같은 ‘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향가 “처용가”에 나타나는 향찰 표기 ‘遊行如可’는 ‘*놀니다가’ 또는 ‘*노니다가’로 해석된다. ‘如可’는 이두에서 ‘다가’로 읽히며 향찰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추정된다. ‘遊’, ‘行’은 각각 중세 한국어 ‘놀-’, ‘니-’ (가다)와 관련되며 ‘遊行’은 그 합성어 ‘노니-’(놀아다니다)였다고 추측된다. 다만 중세 한국어에서는 ‘놀-’의 받침 소리 ‘ㄹ’이 탈락되지만 고대 한국어에서는 탈락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고대 한국어의 주된 어미류는 아래와 같다. (   ) 내는 중세 한국어형이다.

  • 격조사
    • 주격 ― 伊・是(-이)
    • 속격 ― 衣・矣(-ᄋᆡ/-의), 叱(-ㅅ)
    • 대격 ― 乙(-ㄹ~-ᄅᆞᆯ/-를~-ᄋᆞᆯ/-을)
    • 처격 ― 中, 良中(-애/-에. 이두의 독음은 ‘-ᄒᆡ, 아ᄒᆡ’)
    • 구격 ― 留(-로~-ᄋᆞ로/-으로)
    • 공동격 ― 果(-와/-과)
    • 호격 ― 良~也(-아~-야), 下(-하)
  • 보조사
    • 隱(-ᄂ~-ᄂᆞᆫ/-는~-ᄋᆞᆫ/-은)
    • 置(-도) .
  • 어미
    • 종결형 ― 如(-다), 古(-고)
    • 관형형 ― 尸(-ㄹ), 隱(-ㄴ), 期
    • 연결형 ― 古・遣(-고), 弥(-며), 良(-아/-어), 如可(-다가)
  • 선어말어미]
    • 존경 ― 賜(-시-)
    • 겸양 ― 白(--ᄉᆞᇦ-)

자음

고대 한국어에는 예사소리와 거센소리의 대립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권3) ‘或作異次, 或云伊處, 形音之別也, 譯云厭也(異次라 하거나 伊処라 하거나 하는데 사투리 차이로, 번역하면 ‘싫다’란 뜻이다)’의 ‘次, 處’는 둘다 차청자(次淸字)인데 ‘異次, 伊處’는 중세 한국어 ‘잋-’과 관련되는 단어이다. 그 한편, 된소리에 관해서는 그 존재를 명시해 주는 자료가 없다.

중세 한국어에 있었던 어중 마찰음 ‘ㅸ’[β], ‘ㅿ’[z], ‘ㅇ’[ɦ]이 고대 한국어에서 어떤 소리였는지에 관해서는 몇 가지 가설이 있지만 파열음 ‘*ㅂ, *ㅅ, *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가설이 유력하다. 또 이와 관련하여 중세 한국어에서 일부의 ‘ㄹ’이 고대 한국어에서 ‘ㄷ’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정된다. 예 : 波珍 *바ᄃᆞᆯ(중세 한국어 : 바ᄅᆞᆯ)‘바다’.

모음

단모음은 중세 한국어 마찬가지로 7개 모음 체계였다고 추정되는데 /ㅣ/에 두 가지가 있었다(/i/, /ɨ/)고 하는 가설이 있다. /ㆍ/(아래아)는 중세 한국어에서 [ʌ]였다고 추정되지만 고대 한국어에서는 원순성이 강한 [ɔ]였다고 추측된다. 중세 한국어에서 일부의 /ㅓ/는 고대 한국어에서 /ㆍ/로 거슬로 올라가는 것이 있다고 추정된다


향찰

다음은 향가 ‘처용가’의 서두 부분의 해석예이다. 1.은 향찰, 2.는 해석예이다.

  1. 東京明期月良夜入伊遊行如可
  2. 東京 ᄇᆞᆯ기ᅵ ᄃᆞ라 밤드리 놀니다가

이 문장을 해석하는 데 ‘ᄇᆞᆯ기’라는 어형의 타당성(중세 한국어 관형형 ‘-ㄴ’), 처격 ‘良’의 독법(중세 한국어 처격 ‘-애/-에’), ‘遊行如可’는 ‘놀니다가’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현대어처럼 제1 음절의 받침이 탈락된 ‘노니다가’로 보아야 할 것인가 등등, 세부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는 점이 많다.
예를들어  ‘夜音’은 ‘夜’가 훈독자이며 ‘音’이 ‘밤’의 끝소리 ‘ㅁ’을 나타내는 음독자이다. 이와 같이 단어의 끝소리를 음독자로 표시하는 것을 ‘말음 표기’라 한다.


참고자료

구결


한자의 음과 훈(訓:새김)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의 하나. ≪제왕운기 帝王韻記≫에서는 ‘이서(吏書)’라 하였고, ≪대명률직해 大明律直解≫에서는 ‘이도(吏道)’, ≪훈민정음≫의 정인지(鄭麟趾) 서문과 ≪세종실록≫에서는 ‘이두’라 불렀으며, 그 뒤에도 문헌에 따라 ‘이도(吏刀, 선조실록)’, ‘이두(吏頭, 儒胥必知)’, ‘이토(吏吐, 儒胥必知)’, ‘이찰(吏札, 東國輿地勝覽)’, ‘이문(吏文, 典律通補)’ 등의 명칭이 쓰였다.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쓰여온 것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이두(吏讀)’인데, 이 말은 글자만이 다를 뿐 吏道·吏刀·吏頭·吏吐와 같은 말이다. ‘이(吏)’는 ‘서리(胥吏)’의 吏와 같은 뜻임이 분명하지만, ‘讀·道·刀·頭·吐’는 국어의 어떤 말을 글자만 달리해서 표기한 것이라는 사실만이 분명할 뿐이고, 그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대체로 구결(口訣)의 토(吐)와 같은 어원으로 ‘구두(句讀)’의 ‘두(讀)’가 변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와 같이 보면, 이두는 서리들이 쓰는 이두문(吏讀文)의 토라는 뜻이 된다.

실제로는 조사와 어미를 나타내는 토가 중심이 되지만, 그 밖에도 체언·용언·부사들도 있으므로 이두문에 쓰이는 우리말의 보조어라고 할 수 있다. 이두를 이두문에 쓰이는 국어의 보조어라고 하면 이것은 협의의 이두개념이다.

한편, 조선 초기에서부터 차자표기 일체를 가리켜 이두라고 하여 왔다. 당시에는 이두와 구결(토)을 제하고는 차자표기를 가리키는 명칭이 세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20세기 초의 학자들은 향가(鄕歌)를 표기한 표기법도 이두라고 하여, 향가를 ‘이두문학’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 개념이 학자에 따라서는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어서 광의(廣意)의 이두라고 불린다.

그러나 ≪균여전 均如傳≫에서 향가와 같은 완전한 우리말의 문장을 향찰(鄕札)이라 불렀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향찰과 이두를 구별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향찰과 이두는 문체·용도·표기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광의의 이두에 포함되는 것은 향찰 이외에도 구결이 있으나 이 역시 협의의 이두와는 구별된다. 이두가 쓰인 글은 한문의 개조가 있는 데 반하여, 구결은 한문을 그대로 두고 한문의 독해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토만 단 것이다.
〔성립과 특징〕

이두 계통의 명칭으로 가장 오래 된 것은 ≪제왕운기≫ 중의 이서(吏書)이다. 이 명칭은 사회적으로 서리 계층이 형성되면서 생겨났을 것이므로 통일신라시대나 그 이전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시대의 차자표기 일체를 향찰이라 하고, 이두는 고려시대 이후에야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자료상으로 보면 이두문체는 이미 삼국시대에 발달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시대에는 성립되어 19세기 말까지 계승되어 온 것이고, 향찰은 통일신라시대에 발달되어 사용되어 온 것이므로 향찰과 이두를 시대에 따라 구분하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이두문은 한문의 문법과 국어의 문법이 혼합된 문체로서 때로는 한문문법이 좀더 강하게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국어문법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하여 그 정도가 일정하지 않다. 이두문체의 이러한 특성은 그것이 기원적으로 문서체(文書體)에서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이두문은 경기체가(景幾體歌)와 같은 악장(樂章) 이나 시조, 또는 소설에서도 사용된 예가 있기는 하나 본격적인 문예문(文藝文)의 문체로까지는 발달하지 못하였다. 경기체가의 이두문은 문예문의 문체로 사용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이 못 되었고, 그 생명 또한 길지 못하였다.

근대에 와서 시조나 소설에 사용된 이두는 하정상달(下情上達)을 목적으로 하는 이두문의 특수한 표현효과를 일시적으로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독자적인 문예문으로 성립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두는 또 시대에 따라 그 표기법이 발달하기는 하였으나 문어로서의 보수성이 강하여 후대로 올수록 현실언어와 거리가 멀어져 갔다. 여기에다 조사나 어미의 표기도 한문문맥에 의지하는 바가 커서 생략되는 경우가 많았다.
〔창제자〕

이두는 설총(薛聰) 이 만든 것이라는 기록이 일찍부터 있어 왔다. 이 견해는 ≪제왕운기≫ 이래 ≪대명률직해≫ 등의 여러 서적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제왕운기≫ 보다 앞서는 시기의 기록에서는 설총이 이두를 지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았다. 실상 이두라는 차자표기법을 어느 한 개인이 창작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설총은 처음으로 이두를 지었다고 하기보다는 그때까지 발달되어 온 차자표기법을 정리하여 경서를 우리말로 주해하고 새긴 것으로 보인다. 그가 경전을 새긴 방법이 어떤 것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구역인왕경 舊譯仁王經≫의 구결과 같이 한문에 토를 달아 우리말로 새기는 석독구결(釋讀口訣)의 형태였을 것이다. 이것으로 후생들을 훈도(訓導)하였으므로 자연히 그 표기법이 널리 보급되어 설총이 이두를 지었다는 설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현재까지 전하여 오는 자료들을 보면, 이두문에서 진정한 의미의 토의 사용은 설총 이후의 자료에서야 비로소 발견된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면, 이두를 설총 개인의 창작이라고 하기는 어려워도 그가 정리한 표기법이 이두 내지 차자표기법 전반의 발달에 중요한 공헌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용 례〕

이들은 17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것인데, 이두에 한글로 독음을 달아놓아서 이두의 독법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기록 당시의 현실언어가 아니고 투식(套式)으로 오랜 동안 써오는 동안에 와전(訛傳)된 독법도 기록한 것이므로 그 올바른 독법을 재구하는 데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두를 기능별로 분류하고 추정된 독법과 간단한 뜻풀이를 덧붙여 일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명 사

告目/고목:상사람이 양반에게 올리는 글.

衿記/깃긔:분배재산의 목록. 조세액(租稅額)을 써놓은 장부.

根脚/근각:신분조사서(사람의 출생지, 생년월일과 부모의 이름을 써놓은 것).

題音/뎨김:소장이나 청원서에 내리는 관청의 판결문이나 지령문.

流音/흘림:조세를 징수할 때 서리가 대장에서 베껴낸 초안.

卜數/짐수:백성들이 부담한 수량.

役只/격기:손님치르기.

(2) 대명사

吾/나:1인칭.

汝/너:2인칭.

矣身/의몸:제 자신(自身)

他矣/남의, 져의:남의, 저 사람의.

(3) 조 사

주격:亦/이, 是/이, 敎是/이시(존칭).

속격:矣/의(유정물 체언), 叱/ㅅ(무정물 체언).

대격:乙/을.

여격:亦中/여희.

조격:以/(으)로.

공동격:果/과, 와.

(4) 동 사

(5) 어 미

(6) 부 사

이상의 이두들을 표기한 글자들을 차자체계(借字體系)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음독자(音讀字):告目/고목, 根脚/근각, 衿記/깃긔, 卜數/짐수.

독자는 한자를 원래의 의미를 살려 음이나 새김을 차용한 것이고, 가자는 한자 원래의 의미를 버리고 음이나 새김의 발음만 빌려서 표음문자로 사용한 것이다.
〔역사와 자료〕

이두 또는 이두문의 초기 형태는 삼국시대의 자료에서 발견된다. 고구려의 자료로는 4종의 고구려 성벽석각명(高句麗城壁石刻銘)이 있다. 병술명(丙戌銘)의 석각 하나와 기축명(己丑銘)의 석각이 둘, 그리고 연기(年記)가 없는 석각이 하나 알려져 있다. 정확한 기록연대는 알 수 없으나 김정희(金正喜)는 장수왕대(長壽王代)로 추정하였으므로, 이에 따르면 병술명석각은 446년, 기축명석각은 449년에 해당된다.

병술명석각은 다음과 같다. “丙戌十二月中 漢城下 後部 小兄 文達節 自此西北行涉之〔병술 12월 중에 한성(평양)의 후부 소형 문달이 지휘하였다. 여기서부터 서북 쪽으로 걸쳤다(걸쳐 축성하였다)〕.”

이 문체는 자연스러운 한문도 못되고 그렇다고 우리말의 문체도 아니다. 곧, 한문 문체에 우리말의 요소가 가미된 속한문(俗漢文) 또는 변체한문(變體漢文)이라고 불리는 이두문체의 초기적인 형태이다.

이 가운데 ‘中’자는 정확한 날짜를 표시하지 않고 어느 기간을 나타내는 것인데 한문에서는 오히려 없는 편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후대의 이두에서는 ‘긔, 희’로 읽혀 처격조사의 표기로 쓰인 것이니, 이러한 국어적인 표현법이 ‘中’의 용법에 작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節’도 후대의 이두에서 ‘디위’로 읽히고 ‘때에’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之’자도 역시 한문의 용법으로서는 부자연스럽고 국어의 설명형 종결어미 ‘-다’의 영향을 받아 쓰인 것이다. 이 역시 후대에 이두로 발달한 것이다.

이 밖에 최근에 발견된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5세기 말?)가 있다. 여기에도 이두적인 표현들이 있다. 백제에도 이 계통의 문체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들의 문체는 국어적인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이들 가운데 ‘임신서기석’은 한자를 완전히 국어의 어순으로 배열하였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아왔다.

그리하여 서기체(誓記體)라는 특별한 명칭을 부여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幷’·‘之’와 같은 후대의 이두자가 쓰이고 있어서 이 역시 초기적인 이두문체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무술오작비명과 남산신성비명도 임신서기석의 문체와 같이 완전히 국어의 어순으로 표기된 것이다. 무술오작비명에서는 之·者·在·了·作·事 등이 후대의 이두적인 용법으로 쓰였다. 남산신성비는 현재 9개의 비가 발견되었는데 그 첫머리의 명문은 모두 동일한 문장으로 쓰인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辛亥年二月卄六日 南山新城作節 如法以 作後三年崩破者 罪敎事爲 聞敎令誓事之(신해년 2월 26일 남산신성을 지을 때에 만약 법으로 지은 뒤 삼년에 붕파하면 죄주실 일로 삼아 (국왕이) 들으시게 하여 맹세하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후대의 이두자에 해당하는 것을 다수 확인할 수 있으니 作·節·者·以·敎·事·爲·令·之 등이 그것이다. 이 시대의 이두문들은 속한문의 성격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그 문체는 모두 문예문이 아닌 실용문으로 쓰였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도 삼국시대와 같은 속한문의 성격을 보여주는 초기적인 이두문이 있다. 감산사미륵보살조상명(甘山寺彌勒菩薩造像銘, 719)·상원사종명(上院寺鐘銘, 725)·인양사비문(仁陽寺碑文, 810)·중초사당간석주명(中初寺幢竿石柱銘, 827)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한자의 어순을 우리말 어순으로 배열하고 이두에 해당되는 글자들도 사용하고 있으나, 모두 그 본래의 뜻에서 벗어난 용법으로 쓰인 예는 보여주지 않는다.

통일신라시대의 이두문은 토(吐)가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이 시대에 분명한 토를 보여주는 이두문 자료로는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명(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銘, 720)·무진사종명(无盡寺鐘銘, 745)·신라화엄경사경조성기(新羅華嚴經寫經造成記, 755)·신라장적(新羅帳籍, 755?)·갈항사석탑명(葛項寺石塔銘, 758)·영태2년명석조비로자나불조상명(永泰二年銘石造毘盧遮那佛造像銘, 766)·영천청제비정원명(永川菁堤碑貞元銘, 798)·신라선림원종명(新羅禪林院鐘銘, 804)·신라연지사종명(新羅蓮池寺鐘銘, 833)·규흥사종명(窺興寺鐘銘, 856) 등이 있다.

이들 중 신라화엄경사경조성기의 본문은 347자나 되는 긴 글이 자연스러운 국어문장으로 해석되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經成內 法者 楮根中 香水 散0xF674 生長 令只彌”는 “경을 이루는 법은 닥나무 뿌리에 향수를 뿌려서 생장시키며”로 읽히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국어의 어순일 뿐 아니라, ‘經’·‘法’·‘香水’·‘生長’과 같은 한자어를 제하면 모두 우리의 고유어로 읽히는 것이다. 또, 이들 한자어도 차용어이므로 결국은 완전히 국어의 문장을 표기한 것이 된다. 이 조성기에 쓰인 토는 다음과 같다.

조사:者/(으)ㄴ, 以/로, 中/희, 那/나, 0xF674/곰.

이를 표기한 차자들을 문자체계별로 보면,

훈가자:如/다, 0xF674/곰.

이 밖의 차자는 자료상으로는 확인되지 않으나, 삼국시대부터 쓰여오던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시대에 와서 새로이 나타난 것이다. 이로 보면 삼국시대부터 구별되어 쓰여오던 어휘표기법과 문장표기법이 이 토표기에서 합류되어 새로운 발전을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훈독자 ‘者/(으)ㄴ, 中/긔, 之/―다’는 토로 발달하면서 그 본래의 뜻이나 기능에서 벗어나 훈가자로 변하여 가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令只’는 말음첨기법(末音添記法), ‘0xF674’은 토표기에서 약체가 쓰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 표기법이 향찰로 발달하여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그러나 주격·속격·목적격 등의 조사가 쓰이지 않았고 어미의 표기도 불완전한 표기여서 이 표기법이 곧 향찰표기법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 조성기 이후 10세기 초까지의 이두문에서 크게 새로워진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토표기법이 한층 발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영암서원종명(靈巖西院鐘銘, 963)·고달사원종대사탑비음명(高達寺元宗大師塔碑陰銘, 977) 등이 속한문의 문체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두문의 표기는 조선시대의 이두문과 거의 차이가 없을 만큼 발달하였다.

고려시대 최초의 이두자료는 명봉사자적선사능운탑비음명(鳴鳳寺慈寂禪師凌雲塔碑陰銘, 941)이다. 이는 비의 음명이지만 당시 도평성(都評省)에서 내린 첩문(帖文)을 새긴 행정문서이다.

이 이두문에서는 신라시대의 자료로서는 확인되지 않던 새로운 이두와 토, 그리고 새로운 차자를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대격조사 ‘乙/을’의 표기가 처음 나타나는 것이 주목되고, 설명형 종결어미 ‘之/―다’는 이 첩문 이후 얼마가지 않아 쓰이지 않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이 첩문이 신라시대 이두와 고려시대 이두의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밖에 고려시대의 이두자료로는 태평2년명마애약사좌상명(太平二年銘磨崖藥師坐像銘, 977)·정도사조탑형지기(淨兜寺造塔形止記, 1031)·통도사국장생석표명(通度寺國長生石標銘, 1085)·지원18년노비문서(至元十八年奴婢文書, 1281)·지정14년노비문서(至正十四年奴婢文書, 1354)·지정17년백암사첩문(至正十七年白巖寺貼文, 1357)·홍무11년백암사첩문(洪武十一年白巖寺貼文, 1378)·홍무19년남종통기의 노비문서(洪武十九年南宗通紀-奴婢文書, 1386)·이성계호적(李成桂戶籍, 1391) 등 60여 종이 있다.

이 가운데서 ‘정도사조탑형지기’는 연대가 이른 11세기의 기록이면서도 장문(長文)의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두의 다양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이 시대에 이미 이두의 표기법이 완성되어 조선 말기까지 그 이상의 발전은 없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언어의 개신(改新)에 따른 변화가 있었을 따름이다. 이 조탑기는 첫머리의 발원문(發願文) 부분이 초기 이두문이고, 그 밖의 조탑과정에 대한 설명은 모두 국어의 표현으로 되어 있다.

이 조탑기 이후의 고려시대 자료들은 새로운 단어들의 예를 추가할 수 있을 뿐, 표기법이나 문체상의 차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이두의 사용범위가 한문에 밀려 좁아지기 시작하여 12세기 이후는 탑이나 불상 등의 조성기에서는 이두문을 발견하기 힘들다.

조선시대의 이두문은 비교적 많은 자료가 남아 있어서 자료가 부족한 고려시대나 더 나아가서는 신라시대에 이두문이 사용된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문체상으로는 한문의 영향을 받아, 심한 것은 한문에다가 구결의 토를 단 것과 같은 이두문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조선 초기의 이두문으로 주목되는 것은 ≪대명률직해≫(1395)와 ≪양잠경험촬요 養蠶經驗撮要≫(1415)이다. 이것은 이두문으로 백성들의 실생활에 필요한 한문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번역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의 언해(諺解)와 맥이 닿는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1541)은 한문을 이두문과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이두와 한글을 쓰는 사회계층이 달랐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두문은 주로 문서로서 사용되었다. ≪개국원종공신녹권 開國原從功臣錄券≫(1395)·≪좌명공신녹권 佐命功臣錄券≫(1401)·≪병조조사첩 兵曹朝謝帖≫(1409)은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문서를 이두문으로 기록한 것이다. 신하나 백성이 왕에게 올리는 문서인 상언류(上言類)·정사류(呈辭類)·장계류(狀啓類)가 이두문으로 쓰였다.

또한, 관(官)과 관 사이에 주고받는 첩정문(牒呈文)·관문(關文)·단자(單子), 형조의 문서인 추안(推案)이나 근각(根脚), 민간에서 관에 올리는 원정류(原情類)·소지류(所志類), 이에 대한 관의 회답인 제사(題辭), 백성들 상호간에 주고받는 문권류(文券類)인 명문(明文)·성급문(成給文)·화해문기(和解文記)·유서(遺書) 등과 고목류(告目類)·절목류(節目類)·단자류(單子類)가 이두문으로 쓰였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국어를 표기하기에 불완전한 이두를 정음으로 대체하고자 한 것이 그 중요한 목적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훈민정음 창제 후 이과(吏科) 의 인재를 뽑을 때 정음을 시험으로 보게 하기도 하고, 세종 자신이 대간들의 죄를 의금부와 승정원에 알릴 경우에 정음으로 써서 보낸 일도 있었다. 이 밖에도 실록에 나타난 기록들을 보면 이두로 기록되어 오던 영역이 정음으로 대체된 경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두로 기록되어 오던 영역이 한문으로 대체된 것이 있다. 세조 때에는 동반(東班)·서반(西班) 5품 이하의 고신첩(告身牒)이 이두로 쓰여 왔었는데, 한문인 이문(吏文)으로 대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종래 이두로 쓰여 오던 영역이 정음과 한문에 의하여 축소된 것임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한문·이두·정음이 공존하게 되어 이것이 나중에는 사회적인 계층과도 관계를 맺게 되었다. 즉, 선비들은 한문, 중인(中人)들은 이두, 부녀자나 서민들은 정음으로 결부시키는 관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왕이 백성들에게 교서를 내릴 때, 선비들은 한문인 원문 그대로 보내어 알리게 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니 이두를 넣어 방문을 만들어 붙이고, 이것을 또 정음으로 번역하여 촌민(村民)들도 모두 알도록 하라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이두가 사회적인 계층과 결부됨으로써 ≪유서필지≫에서는 서리들이 사용하는 문체를 ‘이서지체(吏胥之體)’라는 문체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이두는 기실 그 존재가치를 상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훈민정음 이전부터 써 내려오던 관습으로 인하여 유지되어 오다가, 사회적으로 서리계층(胥吏階層)이 형성되면서 그들의 문체로 굳어져 19세기 말 국한문혼용체(國漢文混用體)로 대체될 때까지 사용되어 온 것이다. →차자표기법, 향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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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mizlok 2008/04/03 02:14 # 답글

    향찰이 고대한국어 연구를 할 때 연구자를 우울하게 만드는 점은, 대체로 기초어의 초성에 대한 확실한 자료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면에서 통시적인 자음변화를 연구할 수 없고, 따라서 주위 언어와 비교언어학 연구도 제한됩니다.
    단, 향찰로 어미의 변화는 통시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수준으로 알 수 있다고 봐야 합니다.

  • 지나가다Ⅱ 2008/07/23 09:46 # 답글

    期(정확히 말하면 "발긔 ㄷㆍㄹ"의 "ㅢ"(<*ï))를 관형어미로 보는 것은 이기문설. 그러나 저건 *ï를 설정하고 싶은 이기문의 욕심 때문인 거 같고, 저는 별루 지지 안합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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